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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2> 2008/5/26
언론사 울산제일일보 작성일 2008-05-26 조회 6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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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철아, 우리 철아”



글 / 박해룡




중학시절의 동강.

① 슈바이처를 꿈꾸다 경복중 시절 장래희망 '슈바이처' 의료 불모지 일군 개척정신 닮아  슈바이처(1875~1965)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었다. 그는 한 때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서양에서는 링컨보다 더 존경하는 박애정신의 상징으로 뽑히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청소년들의 가치관도 바뀌어 이렇게 숭고한 정신적 지도자를 그렇게 따르지 않지만 식민지 시절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머리가 좋다는 학생들은 커다란 이상(理想)을 갖고 이런 정신을 내 나라에서 실천하려고 애를 썼다. 고(故) 동강 박영철 이사장이 그중의 한 학생이었다. 더구나 슈바이처가 1952년 노벨상을 받았을 때, 아프리카의 병원 건립에 상금과 함께 기부금 모두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학생들로부터 더 칭송을 받던 시대였다. 한동안 기억에서 희미해지던 슈바이처 이름을 동강선생 1주기 추모식장에서 들었다. 그러니까 동강 선생은 작년 이맘때 팔순을 지내고도 일 년 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동강 선생의 흉상 위에 슈바이처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다.  동강선생이 서울의 경복중학교(1940년대)에 다닐 때, 장래의 희망으로 슈바이처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봉사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슈바이처였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남을 위해 희생·봉사하는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서 청소년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슈바이처는 종교적, 음악적, 철학적, 그리고 의학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동강 선생이 그를 본받아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데에는 동강의 사명감 의식이 어린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동강 선생의 성장 과정이 이런 사명감에 잘 비추어진다.  1주기 추모식장에서 박정국 유족 대표(현 이사장)가 낭독한 동강 선생의 시(詩), ‘북악에 나래를 펴고’  언제나 내 마음 창(窓)가에 서 있는 북악(北岳)아 / 그 눈부신 살결 위에 / 하오(下午)의 햇빛이 쏟아진다. / 꽃과 새와 나비와 꿀벌 / 그리고 바람과 내가 이루는 교감(交感)/ 너의 운명을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손 / 그 손에 이끌려 / 우리는 덧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일까  덧없이 만나고 헤어짐에 대한 운명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울산에 동강의료원을 개척한 봉사정신은 너무도 슈바이처를 닮았다. 음악과 시는 예술의 울타리 안에 있다. 슈바이처가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면 동강선생은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 활동과 함께 의술을 자애(慈愛)로서 시행했다면 동강 선생은 당시 인구 10여만의 벽지 울산에서 교육 활동과 함께 의술을 펼쳤다. 지금의 학성 중학교(울산중학교)와 울산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 때의 제자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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