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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2008/6/2
언론사 울산제일일보 작성일 2008-06-02 조회 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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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철아, 우리 철아”



글 / 박해룡




동강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족 사진 위쪽 중간이 동강.

제4화 법도 있는 집안 조선시대, 우리 선조의 가정생활은 양반집 다르고, 서민 집 달랐다. 집의 구조부터 달랐다. 약 50, 60년 전 전라도 지방의 양반집 생활은 최명희의 ‘혼 불’을 읽어보면 대충 상상이 된다. 경상도 지방의 양반 생활이야 당연히 박경리의 ‘토지’이다.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의 서민들 생활을 짐작해보고 싶으면 김주영의 ‘객주(客主)’를 읽어보면 참고가 된다. 헛다리짚어 이병주의 ‘산하’를 집어 들면 서장부터 실망한다. 시대적 배경이 해방되면서부터 혼란스러운 사회상황의 이야기이니까 동강 선생과 비슷한 시기이지만 작가의 지나친 과장으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양반과 서민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말씨부터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며, 서민들은 양반, 소위 뼈대 있는 집, 그리고 부잣집의 생활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 들였다. 양반들은 부부 사이에도 존댓말을 썼다. 음식으로 전라도 전주 지방의 ‘비빔밥’은 양반집 음식이 아니고, 소위 ‘아랫것’들의 음식이었다. 양반의 밥상이 물려진 뒤, 양반 집 일을 거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엌으로 옮겨진 밥상 위의 여러 음식들을 서로 더 먹겠다고 바가지 하나에 밥을 쏟고 여러 반찬들을 골고루 섞어버린 음식이 ‘비빔밥’이다. 어디 양반이 이런 음식을 먹는가?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하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서쪽 한 채를 남향으로, 북쪽에 있는 안채와 그 사이에 제법 널찍한 마당을 끼고 남쪽에 있던 다른 집 한 채를 등지고 자리한 서쪽 별채에 머무셨다.’  동강 선생이 경복 중학교 학창 시절에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에 나가 은상을 타 올 만큼의 문학적 기술(記述) 능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양반 집의 살아가는 모습이 다시 그려진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별채는 서쪽에 붙은 작은 출입문으로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고, 우리가 생활하던 안채는 동쪽 큰 대문으로 외부와 통하고 있었다. 별채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큰 방을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시며 서책을 읽거나 묵화를 그리며 하루를 보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 분들이 찾아오셔서 묵화를 구경하며 담소를 나누던 모습이 떠오른다.’  별채가 떨어져 있는 이런 풍경화에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동강 선생이 할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연히 동강 선생의 부친도 이런 엄격한 교육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 따라서 양반의 체통으로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고, 당연히 남과 타협할 줄 모르고, 상대가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는 짓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분이셨다. 이런 분은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혼자서 모든 결정을 해야 하는 외로움이 현재의 동강의료재단 이사장(박정국)에게까지 내려오고 있다. 법도 있는 집안은 응당 그랬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프롤로그]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1화 슈바이처를 꿈꾸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2화 동강 선생의 제자]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3화 어머니의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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