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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2008/6/20
언론사 울산제일일보 작성일 2008-06-20 조회 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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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철아, 우리 철아”


경남 출신 학우들(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동강선생).
제11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잠시 부잣집 가정교사 외도… 첫 해방감 맛봐 활기찬 서울, 연상여인에 대한 연정이 솟고…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차가 없다. 한 때 TV 드라마에 나오던 ‘야인시대’의 세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차가 1970년대까지 서울의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전차에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꽉 들어차있어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콩나물시루도 요즈음은 보기가 쉽지 않아 콩나물이 어떤 모습으로 옹기그릇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여간 전차 안에서 발을 살짝 들어도 몸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잠시 공중에 떠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꼭 조여 있었다. 요즈음 인도를 배낭여행하면서 대도시 시내버스를 타보면 당시의 우리 대중교통의 어려움을 체험해볼 수 있다. 인도의 버스는 사람들을 문에 엉켜 붙게 해놓고 그냥 시내를 달린다. 이태리 로마도 관광 시즌에는 시내버스 안이 의외로 만원인 경우가 많다. 프랑스 파리도 지하철 전철이 특정 구간에서는 만원이 된다.  모두 이유가 있다. 소매치기의 작전이 있을 때, 어수룩한 관광객을 목표로 하고 그 사람의 혼을 빼는 것이다. 당시 서울의 전차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까지도 시내를 달리는 시내버스에서 시계를 찬 채 손을 밖으로 내놓으면 길 건너편에서 살금살금 버스로 다가와 손목시계를 낚아채 가던 때가 있었다. 전차도 마찬가지로 빤히 보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동강 선생이 서울에서 공부할 때 울산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잠시 가정교사를 다녔다. 안호삼 선생님이 주선해주셨다. 청진동의 어느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숙식을 제공 받는 조건이었다.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을 가르쳐주는 고등학교 학생 선생님이 된 것이다. 이때의 동강 선생이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해방된 느낌은 대단하였다.  ‘…내가 청진동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학생과 선생노릇을 병행하며 등하교를 하던 시절에 본 서울의 느낌은 학교 담장 안에서 뱅뱅 돌 때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서울은 활기가 넘쳤고, 거리에는 자유로운 향기가 가득했다. 스쳐가던 소녀들이 내 교복을 보고 경복중학교에 적을 둔 학생임을 알고 나면 호감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이상하게 또래의 소녀들에게는 전혀 이성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고 연상의 여인들만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여인들의 눈에 비친 나는 한낱 철없는 소년일 뿐이었다.…’  ‘낭만적(浪漫的)이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이나 서울이나 모두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어린 경복중학교 학생은 이런 낭만에 젖을 수 있었다. 울산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서적 영향이 문학 소년의 감상을 낳게 하였다. 이 감상이 콩나물시루 같은 전차의 소매치기를 감동시켰다. 글 / 박해룡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프롤로그]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1화 슈바이처를 꿈꾸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2화 동강 선생의 제자]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3화 어머니의 자장가]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4화 법도 있는 집안]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5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1)]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6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2)]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7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3)]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8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9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10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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