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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2008/6/13
언론사 울산제일일보 작성일 2008-06-13 조회 6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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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철아, 우리 철아”



글 / 박해룡




동강 선생의 중학시절 모습.  

제8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꿈에도 그리는, 가보고 싶은 서울  합격통지서를 받고 하늘을 날 듯  기숙사 생활로 독립정신 길러  1938년에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지금은 고등학교 평준화, 무시험 입학제도에 의하여 세칭 ‘일류고등학교’라는 용어가 없어졌지만 입학시험을 치르고 고등학교에 가던 1972년까지는 경기, 경복, 서울 등등으로 일류고등학교를 분류했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중학교는 5년제이었다가 미군정정 때, 지금의 초등(6), 중등(3), 고등(3), 대학(4)년제로 바뀌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는 당시의 일류학교,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이다.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보다 조선인 학생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우선 서울로 중학교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데에는 동강 선생의 부친으로부터 영향이 있었다. 서울의 선린학습(지금의 선린상고 전신)을 수료한 신지식인(新知識人)이어서 서울 이야기를 어린 동강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꿈에도 그리는, 가보고 싶은 서울이었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하는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망아지는 제주도로’에 의하여 서울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반 담임선생님의 진학지도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전교 수석인 학생을 서울의 제2고보에 보내는 자랑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로 진학한 동강 선생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며칠 후 합격통지서를 받은 나는 하늘을 날 듯 기뻤고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집안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의 칭찬이 쏟아졌고,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동네잔치를 벌였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의 노고에 찬사를 보냈고 나 역시 우쭐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 서울에 대한 환상으로 밤잠을 설칠 때, 나의 부모님은 또 다른 고민을 하고 계셨다. 장손을 홀로 타지에 보내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고 당장 입학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을 고민한 부모님의 결정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정하고 서울로 떠났다….’  당시 서울에 와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하숙(下宿)을 하였다. 대개의 하숙비 기준을 쌀값에 두었다. 대도시 서울의 한 달 치 하숙비가 쌀 한가마 값이었다. 무척 비싼 값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학교를 다니는 혜택을 받는 것이었다. 엄격한 기숙사 규율, 군국주의 풍토에 맞추어 벌점을 많이 받으면 퇴사 시킬 때에, 동강 선생은 잘 적응하였다. 13살짜리 어린 학생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독립정신 기르기 훈련에 들어간 셈이었다. 특히, 단체 생활 중에서 잠자리 적응이 힘들었다. 모두들 귀하게 자란 아이들 속에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여 나만의 공부를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동강 선생은 머리 하나로 이겨내었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프롤로그]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1화 슈바이처를 꿈꾸다]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2화 동강 선생의 제자]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3화 어머니의 자장가]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4화 법도 있는 집안]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5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1)]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6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2)] ▶故 박영철 동강의료재단 이사장 일대기 [제7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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